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화단 운동 (문단 편집) === [[대한제국]]의 참전 ===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던 중 [[러시아 제국]]이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에게 참전할 것을 제의했으나 당시 [[대한제국군]]의 군세는 열악하고 국내에 침입한 의화단과 청군을 막기에도 벅찬 관계로 고종은 거절했다.(이후 연합군이 유리해지자 고종이 참전한다고 했는데 이미 늦었다고 했다.[* 역사적으로 중국은 자기네 나라가 침략당할 때 한반도를 침략해 약탈했다. [[의화단]], [[홍건적]] 등]) 청나라에서 넘어온 의화단과 청군이 [[평안도]]와 [[함경도]]를 월경하여 약탈하자 점차 대한제국군을 강화시켰고 1901년에는 예산의 41%를 국방비에 편성하여 대한제국군의 전력을 강화하였다. 고종은 [[평안북도]] 관찰사에게 진위대 예하 대대들을 나누어 배치하였고 이들과 교전하였다. 진위 5연대의 소대장 조기설 김성열 강희규 등이 청나라 비적 400명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. 1900년에는 [[이범윤]]을 [[북간도]]로 파견하여 조선인 보호 정책을 추진하였다. 1902년부터는 산발적으로 [[압록강]]과 [[두만강]]을 넘어 요동과 간도에도 진출하여 영유권을 두고 청군과 전투를 벌였다. 이때 요동과 간도에 출병한 청군은 15,000여 명으로, [[평안도]]와 [[함경도]]의 진위대, 이범윤의 사포대에 비해 병력수는 압도적이었으나[* 대한제국군은 민병대 포함 5,000명 수준이었다.] 훈련 수준과 무장이 열악했고 [[러시아 제국]]이 은근히 대한제국 편을 든 탓에 [[프랑스군]] 교관단의 지원을 받은 대한제국군이 승리하는 전투가 대부분이었다. 그래서인지 [[https://zh.wikipedia.org/wiki/%E4%B9%89%E5%92%8C%E5%9B%A2%E8%BF%90%E5%8A%A8|중국어 위키백과]] 의화단 운동 문서에는 재중국 [[대한제국군]]의 전기 의병여력 세력 등이 러시아 제국의 중국 동북부 지역 침공에 함께 참여했다고 상단에 서술되어 있다. 1903년에는 지금의 [[선양시]]인 [[만주]] 봉천 일대와 [[지린성]]인 간도 일대에서 대대적인 참호전을 벌이기도 했던 이 영유권 분쟁은 [[러일전쟁]] 직전에 중단되었고 일본이 체결한 '''[[간도협약]]'''으로 끝났다. 참전과는 별개로 [[러시아 제국]]과 [[일본 제국]]을 제외한 연합군의 군수물자 보급을 위해서 많은 인력과 자원을 수출하게 되어 나름 [[전쟁특수]]를 누리게 되었고 이때 얻은 경제적 이득으로 [[광무개혁]]을 지속할 자금을 얻었지만 이것도 [[러일전쟁]]이 벌어지면서 수포로 돌아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